폰으로 끄적거리는거라 음슴체로 쓸게요.
며칠전에 10년만에 옛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음.
(‘님’자를 붙일까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붙임.)
나는 회사를 몇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지금은 어떤 시험을 준비중인 서른살 여자임. (그 선생님 신상이 드러날 수도 있으므로 내가 준비하는 시험이랑 장소, 과목 등은 말하지 않겠음.)
원래는 수험가인 **지역에서 학원을 다니다가 이제 혼자 공부하려고 그 지역에 있는 독서실들을 알아보고 있었음. 시설도 볼겸 무작정 독서실들을 탐방하고 다니다가 한 독서실에 들어감.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 사람이 없어서 돌아나오려는데 지나가던 학생이 사무실은 여기가 아니고 선생님을 만나려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거임.
보통 독서실 관리인은 실장님 또는 총무님이라고 하는데 선생님이라 하는게 의아해서 그 학생에게 물어보니 여긴 일반 독서실이 아니라 학원강사가 운영하는 관리형 독서실이라는 거임. 누가 운영하는 거냐 물으니 @@@선생님이라 했는데 그때 마침 학생들 한 무리가 떠들며 지나가서 ‘@@@’ 이 부분을 못 들었음. 어차피 여긴 모르는 선생님이 더 많으니 그냥 넘겼음.
그 학생을 붙잡고 여긴 얼마냐고 물어보니 자긴 강의랑 세트로 등록한거라 모르겠다며 선생님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라 하고 들어감.
내가 찾는 독서실이 아닌거 같아서 그냥 나오려다가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자 싶어서 다시 돌아서서 선생님이 계신다는 위층으로 올라감.
사무실에 들어가서 그 선생님 얼굴을 보는 순간 굳어졌음.
10년전 재수학원에서 날 가르쳤던 선생님이었던거임.
나는 재수를 했었음.
재수생때 난 교무실 지박령이자 프로 질문러였음.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과목은 ㅇㅇ였음.
ㅇㅇ과목 수업이 있는 날이면 수업 시작 한시간 전부터 교무실에 진을 치고 앉아 선생님께 질문을 했음. 수업이 끝나고도 또 교무실로 달려가 질문을 함. 귀찮을법도 했을텐데 선생님은 성심성의껏 다 설명해줌.
1년내내 그렇게 한 결과 결국 그 과목은 수능에서 만점을 받았고 서울에 있는 괜찮은 대학에 진학했음. 학과도 그 선생님 조언에 따라 ㅇㅇ과목과 관련된 학과에 감.
이러니 내가 그 선생님을 안 존경할 수가 없었음. 엄청 잘 따랐고 대학에 가서도 계속 연락하고 지냈음. 종종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며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고 이런 사제지간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었음.
(여기서부턴 가물가물한 부분이 많아서 생각나는 부분들만 씀. 디테일은 가물가물하지만 인생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서 아직도 제법 기억이 남.)
대학교 1학년 때, 하루는 선생님이 밤에 갑자기 우리 학교 앞에 와있다며 나오라는거임. (그당시에 난 학교 앞에서 자취하고 있었음.)
술먹자는 건줄 알고 나갔더니 선생님이 차를 끌고 와선 차에 타라 하고 뜬금없이 바다를 보러 가자며 출발함. 그때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 당시 선생님에 대한 신뢰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기에 군소리 없이 따라감.
을왕리였나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 근처 바다에 가서 회였는지 조개구이였는지와 함께 술을 마셨음. 내가 선생님 운전해야 하니까 술 마시면 안되지 않냐 했는데 선생님은 한두잔 정도는 괜찮다며 마시더니 결국 많이 마심. 그러다 새벽이 됐는데 선생님이 술을 마셔서 운전을 못한다며 여기서 자고 가자는 거임.
내가 다음날 수업이 있어서 지금 가야할거 같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아침 일찍 데려다 줄테니 일단은 조금이라도 눈좀 붙이고 가자고 함. 엄청 난감했지만 그 새벽에 어쩔 도리가 없어서 선생님을 따라 호텔로 들어감.
호텔에 들어가면서도 주저주저하니 선생님이 웃으며 “내가 널 어찌 할까봐 무섭냐면서, (정확힌 기억 안 나는데) 너같은 애는 백 트럭을 갖다줘도 관심없으니까 착각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자존심이 상할법 한 말을 함. 그때 나는 진짜 순진하고 멍청하던 때라 그 말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음.
호텔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침대에 눕고 나는 베개를 들고 바닥에 누웠음. 선생님이 불편한데 그냥 자기 옆에서 자라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바닥에서 잠. 그렇게 한숨 자고 점심쯤 서울로 돌아왔음.
선생님이 말한대로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에 나는 겁먹었던게 나혼자 오버한 거라 생각하며 다시 안심을 하고 선생님을 여전히 잘 믿고 따랐음.
그러고나서 며칠 뒤에 선생님이랑 또 술을 마시기로 함.
나도 많이 마셨는데 선생님이 더 많이 마셨고 선생님은 비틀거릴 정도로 엄청 취했었음. 그날 대화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얼핏 우리 둘 다 울었었던 것만 기억남. (난 술먹고 자주 욺…)
술집에서 나와 길을 걷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길에서 마음이(?) 춥다며 안아달라고 함. 또 당황해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주저주저함.
선생님이 울먹거리며 다시 안아달라고 말하길래 연민도 생기고 그래서 길 한복판에서 선생님을 안고 등을 토닥토닥해드림.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말고 추우니까 들어가서 안아줘”라고 하면서 모텔을 가리키며 나를 끌어당겼음. 난 이건 아닌거 같아서 버텼고 날 모텔로 끌고가려는 선생님과 잠시 실랑이를 벌임.
그때 정신이 확 듦.
바다에 갔었던 것도, 그동안 야한 농담을 했던 것도, 안아달라 했던 것도 결국 다 이런 뜻이었구나.
나는 선생님에 대한 선생님으로써 좋은 감정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의심을 부정해왔던 거임. 그런데 스스로 부정해오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자 그순간 배신감이 치밀어올랐음. 더없이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생님이었기에 그 배신감의 크기는 이루말하기 어려웠음.
그때 내 태도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남. 정색을 했었는지 아니면 일단은 좋게좋게 얘기했었는지, 아무튼 그때 생각엔 얼른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다신 만나지 말아야겠다 싶었음.
그래서 선생님을 택시태워 보내려고 억지로 끌고 찻길로 갔는데, 선생님이 그러면 이 근처에 자기 사무실이 있는데 거길 가서 한잔 더 마시자고 떼씀. 택시는 안 잡히고 선생님은 사무실에 가자고 떼쓰고, 취한 와중에도 너무 짜증이 났던게 기억남.
그 뒤로 선생님과 연락을 끊었음.
다음날 전화랑 문자가 왔는데 다 씹었고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이 왔는데 다 씹음. 문자의 내용은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충 ‘그날 무슨 일 있었냐, 왜 연락을 안 받는 거냐’ 대략 이런 문자들이었음.
기억을 못하는 건가 싶어서 술먹고 한 실수로 받아들일까 하다가도 배신감이 더 커서 그냥 끝까지 씹었고 그렇게 10년이 지났음.
그리고 10년만에 이렇게 재회한거임.
너무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당황해서 선생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당황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어버버하게 됨.)
선생님은 날 기억 못하고 “누구?”라고 묻길래 얼떨결에 “저 ##이요”라고 대답하자 선생님도 입이 쩍 벌어짐.
그때 선생님이 다른 학생이랑 상담하는 중이라 잠깐 기다리래서 도망갈까 기다릴까 고민하다가 도망가는 것도 웃겨서 그냥 기다렸음.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옴. 10년만에 날 보자마자 처음 한 말은 “옛날엔 (손으로 말랐단 표시를 하며) 이랬는데 지금은…(손으로 살쪘단 표시를 하며)”였음.
내가 근 1년새에 살이 많이 찌긴 해서 민망해서 나도 “저 살 많이 쪘죠.”라고 대답하긴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기분이 나쁨ㅋㅋㅋ.
아무튼 그날 선생님 사무실에서 서로의 근황에 대해 한 10분정도? 짧게 대화하고 나왔음. 선생님이랑 마주앉으니 머리가 복잡해지고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다 옴.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 시험을 준비하러 왔는데 선생님은 수능강사를 그만두고 이쪽 강사로 왔다고 함. (수능과 다른 과목)
어떻게 이렇게 만나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말하는 중간중간에 감정이 복잡해져서 눈물도 날 뻔 했는데 간신히 참고 웃으면서 얘기함. 근데 너무 멘붕상태라 횡설수설하고 무슨 얘길 했는지 그 순간이 잘 기억이 안 나긴 함.
선생님이 조만간 밥 한번 먹자며 메모지에 번호를 적어줌. 일단 그 메모지를 들고 나오긴 했는데 번호도 저장 안 하고 연락도 안 했음.
그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났는데 계속 옛날 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황당하기도 해서 그냥 글을 써봤음.
매일 다니는 독서실이 그 선생님 사무실 근처라 길에서 또 마주칠까봐 너무 신경쓰임. 그 근처 지나갈때마다 고개 돌리고 후다닥 지나가긴 하는데, 마주치기 싫지만 또다시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하는지도 고민임.
아무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네요….
(내 시간ㅜㅜ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시간ㅜㅜ)
+) 추가
ㅎㄷㄷ… 반대가 엄청 달렸네요…
아마도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때 인사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한 말때문인 것 같은데,
당연히 저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고 최대한 피해다니고는 있어요. 그런데 그 독서실이 있는 길이 좁아서 오가다 충분히 마주칠 수 있고 정면으로 마주쳤을때 쌩까고 지나가기엔 너무 뻘쭘한 그런 길이라서 고민한거예요. 당연히 저 멀리 있는 선생님을 발견하고 달려가 인사한다는게 아니죠…
왜 그 근처에 독서실을 잡았냐는 분도 계신데
-> 독서실들이 그 근처에 몰려있어요. 가격, 시설, 정류장에서의 거리 등을 고려해서 정한거고, 물론 더 먼 곳도 있긴 했지만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범죄자처럼 제가 피해서 일부러 더 멀고 더 비싼 독서실로 끊었어야 했다고 생각진 않아요.
왜 호텔에 따라들어갔냐
-> 저도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절대 안 가고 싶었어요. 그당시엔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찜질방을 검색할 수 없었고 근처에 있지도 않았고 새벽이라 차도 없고 그때 인천바다에서 서울까지 택시타고 갈만한 돈도 없었어요. 순순히 따라간건 아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한테 택시타고 갈테니 택시비좀 빌려달라 했으면 퍽이나 빌려줬겠어요. 본문에 썼듯이 선생님이 무시하는 듯이 한 말에 안심하기도 했었고요.
선생님한테 호감이 있었던게 아니냐, 썸탄거 아니냐
-> 그땐 너무 어려서 순진하게 ‘내가 선생님을 선생님으로써 좋아하니까 선생님도 나를 제자로써만 생각하겠지’라고만 생각했었어요. 더구나 나이차이가 거의 20살 가까이 나니까 선생님이 저를 여자로(?) 대할거란 의심을 그땐 전혀 못했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선생님이!! 선생님인데!!’ 이 점때문에 충격을 받았었어요. 그때 그 사건을 통해서 선생이고 나발이고 모든 남자는 ‘일단 남자’란걸 깨닫고 경계하기 시작했지요.
너무 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런 만남이라 경황도 없었고
10년만에 만나서 대뜸 그때 왜 그랬냐 화내기도 그렇고
그냥 그 순간엔 최대한 저의 최선을 다해(?) 빨리 그 상황을 모면하고 나왔어요. 사이다같은 반전이 있는 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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